[국제]호주가 꿈 같어? <6> Dumb, Drunk and Racist 5편 - 호모섹슈얼 2014. 07. 25. 금요일 호주 특파원 Noel  지난  기사  [호주가 꿈 같어? <1>  King Hit] [호주가 꿈 같어? <2> Dumb, Drunk and Racist 1편 ] [호주가 꿈 같어? <3> Dumb, Drunk and Racist 2편 ] [호주가 꿈 같어? <4> Dumb, Drunk and Racist 3편 ] [호주가 꿈 같어? <4> Dumb, Drunk and Racist 4편 ] 인간은 저마다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개 그러한 판단기준은 각자의 경험에서 후천적으로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의 판단기준을 '판단'하고자 할 때에는 그 사람의 성장 배경, 다시 말해 경험을 제일의 근거로 꼽기도 한다. 위에서 말한 이런 모습은 한국사람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겐 성장 배경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소위 말하는 "모태"라는 개념이 대표적이겠다. 어떤 한 사람으로서의 가치관을 주창하며 사회의 대열에 진입하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성장배경속에서 자신의 지성체를 완성하였다고 믿는 단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평범하게 성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이렇다. 어린아이답게, 청소년답게, 학생답게. ' ~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답다'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한국의 문화대로라면, 의무교육 12년에 대학까지 4년하여 16년을 학생답게 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필자가 소싯적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라는 비디오 테이프가 정말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인 줄 알고 틀었다가 스스로 섹스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자연의 섭리는 곧, 반드시 삽입을 하지 않아도 격정에 도달할 수 있는 법을 누군가의 지도 없이 알게 해 주었고, 다들 필자와 똑같이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랍게 해 주었으며, 더불어 성인이 된 이후엔 손보다는 리얼이 더 낫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하나의 비디오 테이프라는 후천적 아이템이 필자의 삶에 준 영향이 이렇다. 성욕이 죄일 순 없으나 진부한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학생 신분에 포르노나 보는 것이 바람직한 성장 배경이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학생은 포르노를 시청해서는 안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00% 바람직한 성장 배경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별로 없다. 학생은 학생답게 대학 가기 위해 또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만 해야한다는 '판단 기준'이 오히려 성장 배경을 흩트리고 있는 결과를 낳는다. 성장 배경(추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매우 적절한 예 특히 한국의 윤리의식에서는 성욕이 터부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단지 표면에만 드러나 있지 않을 뿐 실제 세상에선 마치 유화 작품처럼 그 물감이 찐득하고 단단하게 칠해져 굳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제 우리가 겪는 사회는 그런 유화 작품의 암시장 같다. 수도승이나 살 것 같은 광명의 세상엔 저 위에 계시는 분들만 살고 있는 것 같고 왠지 우리는 지하 수맥이 흐를 것 같은 음지에서 쭈구리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아래의 사진을 보고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의 판단 기준, 쉽게 말하면 선입견과 잣대의 제물이 되길 거부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의 성장 배경을 관장하는 인간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통제되어야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 사진을 보고 피식하면 프로테스탄트가 될 터이다. 출처 : [교육] 심의 과정을 따르라 찌라시들이여, 꾸물 팀장 어찌 할 수도 없는 성장 배경을 가지고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런 속에서 살아왔다. '성장 배경 =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등식이 아니라, '성장 배경 = 부모가 시키는 대로 또는 남들 다 하는 대로'가 되어버린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서 경험을 통해 그 사슬을 부수고 나오기도 하지만 그중엔 ATM처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는 오늘 호주의 동성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론을 글머리에서 미리 밝히고 싶어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이란 건 실제로 우리가 원하지 않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타인'의 철학 또는 케케묵은 전통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아서 믿을 만한 게 못된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호주의 동성애 문화에 대해서는 밝힐 것이 별로 없다. 2013년 10월, 호주의 행정수도인 캔버라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 던 적이 있다.   그러나,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혼이므로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연방결혼법에 의해 위헌이라는 호주 대법원의 판결이 같은 해 12월에 나면서 2개월 간 캔버라에서 결혼한 27쌍의 동성커플들은 그 결혼의 효력을 상실하였다. 현 호주 총리인 토니 애벗(Tony Abbott)은 호주 보수당인 자유당의 총수로서 당선 전부터 동성 결혼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왔고 당시 캔버라의 동성 결혼법에 대해서도 실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필자가 단순히 호주의 동성애에 대한 글을 쓰려면 위의 몇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억지로 후벼 파서 분량을 더 얻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이번 글을 통해 호주의 동성애 문화를 통해 얻은 경험과 생각을 나눠보고자 한다. 오늘 만큼은 호주가 아니라 호주를 핑계로 세상 모든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동성애 뿐 아니라 동성 결혼에 매우 찬성하며 기부고 나발이고 뭐고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줄 사람임을 먼저 밝혀둔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경고했지만 다시 한번 경고한다. 동성애 하면 #질병, #더러움, #성경, #소돔, #말세 등의 부정적 헤쉬테그가 떠오르시는 분들은 가급적 이 글의 일독을 자제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반대의 입장은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동성애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언사는 역시 자제해 주시길 바란다. 난 개독이었소 (근데 저 스님도 개막장이었다능. 궁금하면 여기 ) 잠깐 사족을 좀 달자. 필자의 성장 배경은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다. 소위 모태신앙이라는 것으로 카톨릭에 귀의해 영세를 받고 영성체를 모시고 견진을 받고 한때는 주제파악도 못하고 사제가 되기를 꿈꿨을 정도다. 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개인의 역사만큼 듣기 괴로운 것도 없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제를 꿈꾸기 시작한 직후 필자는 카톨릭을 떠나서 소위 말하는 개독과 함께 했던 적도 있는데, 이름도 거기서 거기인 수많은 분파에서 서로가 참 진리니 지랄 옘병을 하는 틈바구니를 바이블 하나만 들고 헤매다가 마지막으로 등떠밀려 안착한 교회는 마치 금수원 같아서 결국 완전히 교회를 떠났다. 이 정도로 요약하겠다. 그래서 하느님, 하나님, 여호와, 야훼, 성서, 성경같은 종교적 전문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을 참 많이 읽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동정녀'가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과 같은 함자인 줄 알았을 철부지 시절부터 많이 읽었다. 아버지께 '동정녀'가 뭐냐고 여쭸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보통 그럴 땐 두 번 질문하면 자칫 처맞기 일쑤였고, 아버지가 대답을 못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야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는 왜 그렇게 야한 함자를...'이라고 꽤 오랜 시간동안 믿고 살았을 정도로, 되돌아보면 그렇게 병신 같을 때가 있었다. 여튼, 예나 지금이나 성경을 끼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사고방식이 편협한 경우가 많다. 적당히 하면 편중에 그치고 말 것을, 굳이 편협에 머무르려고 한다. 수천 년 전에 쓰여진 바이블을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 자체도 시대착오적이거니와, 성경적 해석이 파별로 다르다. 필자는 최근까지 그 틈바구니에 있었다. 호주의 대도시에서는 동성애를 어디서든 목격할 수 있다. 다만 호주도 보수권이 득세하는 곳이다 보니 표면에 잘드러나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처럼 숨어야 편할 정도는 아니다. 호주는 동성커플에 대해서도 법적인 사실혼을 인정하고 있다. 호주 연방결혼법에 의거하여 결혼만 할 수 없을 뿐이지, 동성 커플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상의 혼인관계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즉, 호주는 동성 결혼을 반대하고 있지만 개인의 권리로써 동성애를 허용하고 있고 동성애로 인한 사실상의 혼인관계 역시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물론 쌍방이 공동명의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등의 가치공유 증명이 되어야만 인정 받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가 동성애를 인정하고 있으며 문화 자체도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해 꽤 관대하고 그 머릿수도 일상적인 편이다. 가족과 친지들의 축복속에 이루어진 호주 최초의 게이 부부, '아이반 힐튼'과 '크리스 틴치.  이들의 혼인은 2개월 후 호주 대법원의 위헌판결로 효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필자는 가끔 게이나 레즈비언을 마주칠 때마다 소금기둥이 되곤 했다. 필자가 알고 있는 동성애란 소돔을 괴멸시킨 몹쓸 짓에 불과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이 절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믿는 창세기에 근거하여, 신이 남자와 여자를 빚은 이유를 완전히 모독하는 것이라 믿었다. 심지어 대홍수 때도 노아는 방주에 암수 한 쌍씩을 태워서 멸망으로부터 지켜냈다는 건 그런 주장을 더하기 위한 나름의 양념이었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N극이 있으면 S극이 있다는 이치도 마찬가지로 필자의 주장에 대한 양념으로 이용되었다. 필자는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으나 일시적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감정이 소원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종의 신앙 부재로 인한 마음의 병이며, 신앙을 얻음으로써 치료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사실 그 믿음은 인터넷을 떠돌다가 본 어떤 좀 배웠다는 사람의 글 내용에서 비롯되었는데, 거기에 지나치게 공감했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부부관계에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며 입양을 한다고 해도 엄마의 부재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즉, 이치적으로(또는 성경적으로) 언젠가 그 관계의 부적절함을 느끼는 때가 오면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라 믿었다. 필자도 나름 논리적이고 평등한 인간이고 싶었던 모양인지,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했다. 다만 그것은 불행을 넘어서 죄악으로 번질 수 있고 스스로가 그것을 판단해 바로잡아야 할 책임 정도는 있다고 여겼다. 지금부터 말할 내용을 생각할 때면 스스로에게 기가 막혀서 아직도 헛웃음이 나온다. 필자는 호주에 살고 있고 호주의 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호주의 동성 파트너에 대한 배려를 인정은 하지만, 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인이며 설상가상으로 성경적 보수파였기 때문에 동성 결혼만큼은 강하게 반대했다. 물론 그들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거다. 필자는 인종차별이든 뭐든 차별을 겪고 싶지 않고 겪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고, 몇몇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차별하지는 않되, 구별되고자 하는 일련의 행위를 뻑휴 쯤으로 여겼는데, 동성애자들과는 구별되어지고 싶다고 여겼던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었다. 필자는 신성을 팔아서 세상 모든 동성애자들을 마치 내가 낳은 내 자식인 양 배놔라 감놔라 지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타 차별주의자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극복해야 하는 것은 호모섹슈얼이 아니라 나 자신, 호모포비아였다. 1. 성경적(종교적) 시점에서의 동성애 인간의 판단 기준이란 성장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하지만 필자는 모순적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성장 배경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일부에게서는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박수받을지는 몰라도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성경이 지금의 시대까지 전부 아우르고 있지 않다면 이런 모순은 당연하다. 심지어 수도사라고 해도 이 시대에 100% 성경을 토대로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성경이 쓰여지기 전에도 그랬고 쓰여지고 있는 중에도 그랬고 앞으로 시간이 수천 년을 더 지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흔히,'소돔'은 동성애로 하여금 유황불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맞아 괴멸했다고 알려져 있다. 성경적으로. 그런데 당시 정황을 토대로 고려해 보면 이러하다. 구약이 쓰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및 아라비아 문화권 뿐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권까지 동성애는 널리 퍼져서 하나의 문화였다고 한다. 즉, 신이 동성애를 징벌하려고 의도했다면 전 세계가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맞아야 했다. 최소한 2차 대홍수 정도는. 동성애는 서구권만의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간혹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 주제로 'Sodomite'가 언급되곤 한다. Sodomite는 동성애라는 뜻이며 그것이 과거 소돔에게서 유례되었다고 말하면서, 소돔의 멸망을 지금의 동성애와 결부시키곤 한다. 이것이 멸망의 징조라는 것이다. 이것은 '동성애'와 '남색'을 하나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오류다. Sodomite는 정확하게, 동성애자가 아닌 남색가 또는 수간자를 뜻한다. Sodomite라는 단어는 '남성과의 항문성교를 즐기는 남성' 혹은 '동물과의 섹스를 즐기는 남성'으로 해석된다. 즉, 지금의 기독교는 동성애와 미트스핀을 하나로 본다. '게이=남창'이라는 등식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립되어 왔고 연이어 남창 = 질병 = 에이즈라는 억측도 덩달아 성립되었다. 그냥 갖다붙이는 것이다. 사실 수천 년 전의 동성애는 남창과 전혀 연관이 없지 않다. 각 종교의 성서들이 쓰여진 수천 년 전에는 문화적으로 덜 성숙된 시기라 인간이 즐길 만한 엔터테인먼트가 많지 않거나 거의 없다시피했다. 콜로세움이 열렸을 때, 로마 시민들은 검투시합에 푹 빠졌다. 시합만 주최하면 정치적 물타기 도구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일, 그리스를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국가에는 남색과 수간이라는 유희가 있었다. 좀 산다는 귀족들은 어리고 예쁘장한 보이들을 불러다가 남색을 즐겼고 못사는 하층민들은 가축들과 수간을 했다. 심지어 남색이 고상한 취미로 여겨지기도 했다. Edouard-Henri Avril 작,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심복 안티누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남창이라며 손가락질 받곤 하는 게이 커플들조차도 심지어 항문섹스를 고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스라엘, 유태인의 헌법전과도 같은 레위기, 솔로몬의 잠언, 이스라엘 왕들의 치정과 역사를 그린 열왕기상하, 신명기, 고린도, 디모데... 모두 남창을 금하고 있을 뿐, 사랑을 금하고 있지 않다. 미트스핀 때문에 항문에 아주 조그만 염증이 생겨도 충분히 죽을 수도 있는 시대에 남창이 금기되는 건 당연하다. 현대에서도 게이들의 사랑이 남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게이 커플=남색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 둘만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피해를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전혀' 없다. 그래서 튀어나온 게 에이즈다. 항생제를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연고만 발라도 낫는 성병 정도는 거부감을 주기 약했고, 에이즈가 딱이었다. 에이즈는 에이즈 보균자와의 성적 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것이지, 항문섹스를 한다고 해서 에이즈가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종교적 그림에 입각하여 일단 남색은 '더럽다'는 느낌이 이미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란함의 상징인 에이즈를 추가하여 ' 게이 커플=남색=에이즈'  라는 등식을 만들어 게이 커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의 부담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남들도 똑같이 보기 싫어야 지들이 보기 싫은 것을 치워버릴 수 있다는 명분 생산인 것이다. 이성과 동성을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둘이서 자면서 섹스를 하든 부루마블을 하든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것이 21세기다. 포르노와 자위, 딜도와 바이브레이터가 죄악이 아닌 엔터테인먼트인 시대다. 물론 성경을 믿는 사람이 성경적인 삶을 사는 것은 경건한 일이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은 사람이 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이 내 곁에 임하셔서 해설해주지 않는다. 신이 인간을 위해 직접 사사로이 조언을 해주지도 않지만 요즘 시대에 성경을 당시의 시대상에 빗대어 이해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다. 동성애는 비정상이고 이성애는 정상이라는 판단 기준은 거대 종교와 함께 한 인류 역사의 성장 배경에서 말미암았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류를 이끌고 아우르던 '종교'들은 원칙적으로 신성을 앞세워 동성애를 거부했다. 언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매? 그러므로 성경과 무관하게 자신이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고 싶으면 성경의 이름으로 그게 가능한 것이다. 닝겐주제에. 2. 탐구 적 시점에서의 동성애 동성애, 호모섹슈얼이라는 감정은 대게 후천적인 자극으로 인해서 발생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후천적인 자극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을 뿐, 발생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선천적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성애자가 선천적으로 이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고친다고 하는 일련의 행위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남자이고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만나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반대하면서 자꾸 남자를 만나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간혹 동성애를 '치료'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 보고들은 심지어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치 인터뷰 하듯이 당사자를 카메라 앞에 앉혀 놓고 찍은 동영상들 말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동성애자 치료 사례'들을 짚어 보자. 대부분의 공통점은 동영상 또는 보고서 말미에 그 보고가 신앙간증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규정하고 향정신성 약물 및 상담을 병행하여 치료하였다는 사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아는 한,(정확하게는 경험에 의하면) 향정신성 약물은 일종의 진정 효과를 줘서 일시적으로 치료된 것과 같은 모습을 줄 뿐 영구적이라 볼 수 없고 진정한 치료 효과는 차라리 의사와의 상담으로 얻는 경우가 많다. 전 기계를 수리합니다. 하지만 제 게이 아들을 고칠 순 없어요.  왜냐하면 그는 고장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동성애는 그저 모습만 다를 뿐이다.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해서 환자일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호주의 백인들과 딱 보기에도 엄청 다른 필자 같은 아시안들은 모두 환자여야한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치료하겠답시고 붙들어 놓고 상담하고 설득하면 향정신적인 작용으로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는 있으나 고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리적으로도, 정신병리학적으로도 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동성애자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자폭을 하는 병신들이 가끔 있는데, 그것은 지들에게는 권리가 있고 동성애자들에겐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나치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고대에서부터 존재해 온 동성애가 그 증거일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가치와 정의가 최우선인 시대를 살면서 동성애를 '틀림'으로 보는 것은 차별이며, 필자가 그러했듯이 동성애를 향한 무조건적인 거부감과 차별이야말로 인종, 종교 등으로 선을 긋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3. 전지적 시점에서의 동성애 동성애 반대에 대해 위의 사진에서처럼 신성을 근거로 하는 사람들이 빠져 있는 모순이 있다.( 위에서 필자는 '성경을 파는 행위'라고 말했다) 과거 필자가 그랬듯이 그들은 동성애자에게 신성모독을 갖다 씌우지만, 사실 그런 행위는 그들이 '신 성불가침'으로 독박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동성애가 매우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을 안다. 다만 종교를 중심으로 성장한 전 세계 문명의 윤리적 역사관에 의해 숨겨지고 감추어 졌다는 것도 안다. 원래 존재했으나, 인간의 가치보단 신의 가치가 월등했던 시절을 거쳐 가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신은 인간이 동성애를 악으로 규정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분명히 말하건대,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잡혀 돌팔매에 죽임을 당할 여성 앞에 나서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다. 필자는 동성애를 겨냥해 반대의 입장이 아닌 온갖 힐난과 멸망의 징조를 들이붓는 이른바 개독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 사랑'의 의미에 대해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전지적 시점에서 본다면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란 대자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바닷가의 헤아릴 수도 없는 모래알갱이 한 톨이나 다름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이작 뉴튼은 죽기 전, 자신의 업적은 바닷가에서 작은 조개 껍데기 하나 주운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신을 믿거나 말거나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은 그저 '따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닝겐 주제에 엄연한 인간의 사랑을 죄악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사실 신 앞에서 동성애가 꼴보기 싫어할 자격도 없다. 즉, 사랑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을 기준으로 상처를 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동성애를 두고 마귀의 꼬임이라느니 하고 정의하는 것은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물며 신을 대리해 신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온 예수 그리스도는 간음하다 걸린 여성을 나서서 보호했다. 그것은 '니나 잘하세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 그냥 사랑인 것이다. 장담하건대, 되도 않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개독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녀를 보호하는 성경 속 장면을 절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본받으려면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할 텐데. 이해하기 쉽도록 항상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는 알려주고 가르치기 위해 군중들 앞에서 설교했고 그것이 성경이라는 문서로 남아 있음에도 심지어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읽고 학습하고 심지어 외우기까지 하면서 더 신실한 신앙을 달라고 기도만 할 뿐, 바라기만 할 뿐 실천을 하지 않으니 동성애라고 하면 극악스러운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믿으면 마치 예수와 친구라도 된 양 설치는 꼬라지가 어찌나 가관인지. 동성애가 신성을 모독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간음한 여성 앞에 섰음과 같이 동성애 역시 같은 사랑으로써 거역할 수 없는 신의 뜻이어야 할 것이다. 즉 신성모독을 들이밀면서 신의 영역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세상에 와서 그들을 본다면, 동성애자들이 그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 어떤 자료들을 찾아봐도 얘들이 가장 정확한 듯 물론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의 어떤 오류 또는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버거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동성애를 결국 지지하게 된 필자의 속마음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히 질병이 아니며 사랑은 모두 똑같다는 것에는 그 무엇을 근거로 하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당신이 호주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3월에 시드니에서 펼쳐지는 '마디그라스'( Sydney's Gay & Lesbian Mardi Gras) 축제를 반드시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마디그라스 퍼레이드는 전 세계 최대의 게이 축제들 중 하나다. 설령 당신이 동성애에 혐오감이 있다고 해도 그 축제에 함께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인종과 국적, 성별과 출신, 사회적 지위, 종교 및 가치관 등 모든 것을 막론하고 똑같은 인간으로서 마음의 벽을 거두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해하는 축제다. 남녀가 거의 전라나 다름 없는 복장으로 퍼레이드에 참석하지만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의 존슨은 절대 텐트를 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외설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편견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껍데기를 벗어던진 사람들이 벌이는 축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경험하길 권한다.      호주는 대법원이 2013년 12월 동성 결혼에 위헌 판결을 내린 이후로 적어도 자유당이 집권하는 동안엔 연방결혼법에 대한 재검토를 하지 않을 움직임을 보인다. 혹자는 '파트너쉽이 인정되는데 왜 굳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질문해야겠다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쉽다. 당신이라면 결혼하고자 하는 미래의 남편 혹은 아내와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도 없이 살 수 있겠는지. 사람들이 왜 결혼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다. 그렇다. 똑같은 것이다. 심지어 호주의 보수주의자들조차도 호주에 동성결혼 합법화가 임박했음을 시사하고 있고 머지 않은 미래에 호주는 동성결혼이 합법인 국가가 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이 시대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억눌려왔던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최우선의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신이 보시기 참 좋을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집으로 인해 분쟁을 소모전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곧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최근에 이스라엘의 아집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필자는 그저 지금의 이스라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분쟁을 거쳐 이뤄낸 화합은 담금질한 쇠처럼 결속이 단단하다. 적어도 필자는 동성애를 포함한 지금 세상의 모든 분쟁이 단단한 화합을 위해 치뤄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내까짓 게 뭐라고 당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지만 당신이 만약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이것만큼은 기억해주시길 바란다. 당신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낮설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감일 수 있다. 만약 동성애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나중에 깨닫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긍정적인 마인드로 투영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변화가 찾아오면 애써 고집을 부릴 필요는 없다. 부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움으로 느껴질 때, 그것을 부자연스럽게 느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캐캐묵은 뭔가에 의해 내가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Noel 트위터  @After_Burner_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