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국무총리 후보 추천합니다. 최근 국무총리 인선에 있어 참 시끄러웠습니다 .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선이었는 데 암튼 2 번 연속 청문회도 못해보고 탈락하였습니다 .   깜냥도 안 되는 사람을 인선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도 청문회는 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튼 국민들의 정서와는 꽤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었슴은 맞는 것 같습니다 .   주위에 그런 사람을 일부러 찾으려고 해도 없는 데 어떻게 그런 분들만 나오는 지 참 궁금합니다 .   참 이상하게도 장관이나 총리들 보면 우리 주변에서 사는 소시민들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이번에 큰 맘 먹고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 (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 를 찾아 보았습니다 .   훌륭한 정승 중에 다 아시다시피 세종 때 맹사성이나 황희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제 눈에 확 들어온 이사람 그렇습니다 바로 정몽주 입니다 . ( 정몽준 오타 주의 )   꾸물님의 찌질한 위인전을 흉내내어 정몽주에 대해서 적어 보고자 합니다 .   밑의 글은 임용한 선생님의 시대의 개혁가 들에서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     정몽주의 고향은 경북 영일이다 .   지금도 매우 시골이지만 그 당시에도 더 그랬다 . 고려시대 인물 중 출생지를 명확히 아는 경우가 많은데 정몽주는 공덕비가 발굴되어 정확히 알 수가 있다 .  뒤에서도 나오지만 정몽주의 공덕비는 꽤 많고 이것은 그가 얼마나 당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 지를 설명해 준다 .   얼마 전 선거에서 고승덕의 학교 때 성적 가지고 말이 많았는 데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공부를 엄청나게 잘 했다는 것이다 . 아 물론 성적이 좋다고 좋은 관료나 정치가가 되는 충분 조건은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성적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좋은 것은 정치가가 되기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임이 틀림이 없다 .   하지만 성적이 가장 좋은 ‘ 장원 급제 ’ 자 중 의외로 정승이 적은 데 실제 조선 시대에 장원 급제를 하고 영의정에 오른 사람은 ‘ 최항 ’ ( 최충헌 손자 말고 조선 시대 인물임 ) 과 노태우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 노사신 ’ 그리고 대동법을 실행 시킨 ‘ 김육 ‘ 정도 이다 . 그리고 고려 시대까지 범위를 넓히면 정몽주도 여기에 포함된다 .   아무튼 경북 시골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1355 년 부친상을 당한 정몽주는 삼년상 – 당시는 불교 국가여서 유교식 3 년상을 치르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함 - 을 치르고 1359 년 소과에 응시했다 .     소과는 생원 진사를 뽑는 시험이다 . 소과에는 초장 , 중장 , 종장이라고 부르는 3 번의 시험이 있는 데 장마다 시험과목이 다르다 . 그는 이 세 번의 시험에서 연속으로 장원을 했다 . ‘ 전과목 수석합격 ’ 이다 .  사실 요즘도 고시 3 관왕은 간간히 있지만 이렇게 모두 1 등을 한 사람은 드물다 . ( 위에서 말한 고승덕도 연수원 성적은 12 등 이었다고 참고로 같이 졸업한 문재인은 2 등 )   이런 결과는 요즘으로 치면 신문에 대서특필될만한 대형사건이었다 . 이 삼장 모두 장원은 고려시대보다 문벌귀족의 특권이 대거 축소된 조선시대에 조차 드문 기록이다 .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정몽주의 집안과 출신으로 보면 한번의 장원도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 장원을 하려면 대단한 집안 배경이 필요로 했고 조선시대에도 ‘ 장원 ’ 은 서울의 명문대가 집 자제에게 준다는 암묵적인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  대 문호 송시열도 이 관행에 걸려 장원을 못 할 뻔 했는 데 마침 시험관이 송시열을 알던 최명길 ( 김한길과 관계없는 사람임 ) 이어서 장원으로 뽑혔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   자꾸 엇나가는 데 그럼 조선 시대의 최고 천재는 누구일까 ?   아마 율곡 이이 일 것이다 .   율곡 이이도 응시한 과거 시험 9 번 모두 장원을 하여 ‘ 구도장원공 ( 九度壯元公 ) 이란 별명을 얻었다 .   누구 문하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어머니에게 배우고 혼자 독학을 했다고 한다 . 한편 퇴계 이황 선생은 과거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 시험 잘 보는 게 천재라고 가정 할 때 내린 결론임 . 오해 마시기를 )   참고로 과거에서 장원을 하면 무조건 문관 6 품관으로 등용되는 데 순수한 행정 관료가 아닌 정치적 능력을 보유하기 시작하는 관료이다. 6품과 7품은 한 품 차이지만 그 의미도 다르고, 이 한 품을 넘어서기도 쉽지 않다.   장원이 아닌 급제자가  관료가 되려면 이조의 인사 담당관이 그를 뽑아주어야 한다 .  그것이 장원 논쟁을 일으키는 진짜 이유가 된다 .   아무튼 정몽주는 이 대단한 차별의 벽을 그곳도 세 번 모두 장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뚫었다 . 2 등과의 압도적인 성적의 차이가 아니라면 그것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 아주 당연하게도 이 천재는 소과 다음 시험인 대과에서도 당당히 장원으로 합격을 한다 .   그 후 그는 성균관 교수로 채용되었고 쟁쟁한 수재답게 사서 [ 논어 ] [ 맹자 ] [ 대학 ] [ 중용 ] 에 대한 주자의 주석서인 < 주자집주 > 를 제대로 해석하고 가르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이때는 주자학 수입 초창기여서 주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 데 천재 정몽주는 독학으로 그것을 풀어냈다 . 훗날 조선시대에 가서 중국에서 들어온 다른 유교의 경전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을 비교할 때 틀린 곳이 없어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고 한다 .   정몽주의 문인 이색은 번번히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 정몽주가 이치를 논평한 것은 물론이고 이러저러하게 함부로 하는 말도 그 어떤 것이니 모두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 라고 했다 .( 정말 최고의 칭찬임 )   학자로서 정몽주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 그는 나라의 하나 뿐인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가장 유명한 교수이자 총장이다 . 과거 급제자의 대부분은 성균관 출신이고 앞으로의 대부분의 과거 급제자와 관료가 그의 제자가 되고 그는 가만히 있어도 부와 명예는 보장되는 것이었다 .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고 위험했다 . 학자적 존경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면 위험한 세계로 뛰어들어야했다 .   정몽주는 1372 년 ( 공민왕 21 년 )  3 월   명나라 가   서촉 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 에 파견되는 정사 ( 正使 ) 인 지밀직사사 ( 知密直司事 )  홍사범 ( 洪師範 ) 의   서장관 으로 당시 명나라의 수도 남경에 다녀왔다 . 당시 중국은 원과 명이 갈라져 있어 명나라의 수도는 남경이었다 .     남경에서   고려 로 귀국하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 정사인   홍사범   등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 일 만에 살아났다 . 배 조각을 붙들고 바다 위를 헤엄쳐야 했을 정도로 심각한 난파였는데 실제 생존자도 겨우 20% 정도 였다고 한다 . 그 후 지나가던 중국 배에 겨우 구조 되었다 .   그는 가슴 속에   명 태조   주원장 의 서신을 간직하며 물에 한번 젖지 않게끔 보존하고 있었다 .  명 태조 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보내어 굶주림 속에서도 의연한 그의 모습을 보고 귀국을 도와주었으며 , 이 사실이 알려져   명 나라 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   당시 고려시대는 왜구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었다 .   전쟁은 싸움 잘하는 무관만 하는 줄 알지만 사실 전쟁 대부분은 결전의 시 훈련 , 행군 , 진지구축 , 보급 관리 행정 정보 연락을 하고 그러는 데 시간을 보낸다 . 한자는 너무 어려워서 무관 중 읽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당연히 이런 일은 문관의 책임이었다 . 실제로 전투를 하는 시간은 정말 짧다 .   참고로 우리가 왜구라고 하면 그냥 바다 해적으로 아는 데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고려시대 백성 중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은 왜구를 피해 바다에서 50 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만 살았다고 한다 .   물론 고려뿐 아니라 조선 명나라 등도 왜구 때문에 엄청 고생을 했는데 그래서 16 세기 중엽에 명나라에서는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척계광 장군이 국민적 영웅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   웃긴 것은 지금도 무협지 하면 중국인데 그 때 무협지에 나오는 난다 긴다 하는 곽정 같은 고수들이 왜구와의 다이다이 싸움에서 다 개박살 났다고 한다 . 비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칼을 쓰고 무술이 뛰어났던 왜구들 , 사무라이들은 1:1 대결에 몹시 능했다고 한다 .   이 때 고려에서는 왜구 토벌에 활약을 한 사람이 최영과 이성계 등인데 정몽주는 이성계의 여진과 왜구 토벌 전투에 참가하였다 . 이들 둘다 승리를 이끌어 척계광 처럼 국민적으로 지지를 받게 된다 .   아무튼 이성계의 왜구 토벌로 나라의 영웅이 되는 데는 정몽주도 큰 역할을 하였다 . 당연하게도 둘은 절친이 되었으며 실제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을 때 ‘ 내가 사약을 먹고 싶은 심정이다 ’ 라고 말하며 이방원을 꾸짖는다 . ( 물론 정몽주도 이성계가 자기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성계 집에 갔다가 당한 것이다 . 정몽주는 이미 힘의 균형이 이성계를 떠나 이방원에게 넘어가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   특히 우왕 대는 왜구의 침공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 소탕작전에 한계를 느낀 고려는 왜구의 본산인 규수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단속을 요청했다 . 하지만 당시 왜구는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지방 정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 규수의 영주는 고려 사신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투옥해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굶기다가 돌려보냈다 .   1377 년 정몽주를 제거하고 싶었던 친원파는 기회다 싶어 언양 유배에서 돌아온 정몽주를 사신으로 선발했다 . 친원파가 비교적 친했던 이색도 정몽주 제거 음모를 막지 못했다 . 이색은 걱정이 되었는 지 장문의 시를 지어 사신으로 떠나는 정몽주를 환송했다 . 속으로는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   규수에서 정몽주가 어떻게 했는 지 그리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규수의 영주는 정몽주에 매료되었다 . 그는 왜구를 단속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왜구에서 잡혀온 포로 수백 명을 돌려 보내는 호의를 베풀었다 .     이 한번의 사행으로 왜구가 근절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효과를 보았던 것 같다 . 고려가 망한 후 조선에서는 경기도 연천에 숭의전을 지었는 데 여기에 고려의 대표적인 신하 16 명 중 정몽주의 위패가 있는 데 그 이유는 선죽교에서의 충의 때문이 아니라 왜구 문제의 해결 때문이었다 .   정몽주가 성균관의 대사성으로 있을 무렵인 14 세기 말에는 대명 관계가 좋지 않았다 .   혹시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읽으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혹독하고 각박하고 지독했다 . 최하층 빈민에서 양자강 수적 ( 그러니까 강의 도적 ) 을 거쳐 황제까지 된 인생 여정을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 자신에게 조금만 불리하거나 위험한 징조가 보이면 가차없이 상대를 제거했다 . 주원장의 통치관은 ‘ 내가 손해를 보는 것 보다는 ( 억울하든 말든 ) 상대가 고생하는 것이 낫다 ’ 라는 것이다 .   그의 폭력성은 진시황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 당시 그의 눈에 고려는 아직 믿을 수 없는 변방의 국가였다 . 더군다나 약 100 년가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   그나마 사랑했던 노국 공주가 원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반원 정책을 폈던 공민왕이 살해가 되고 우왕이 즉위했다 . 이 뒤숭숭한 기간에 친원파였던 재상 ‘ 김의 ’ 가 고려에 와 았던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원나라로 도망갔다 . 명과 외교 관계가 개통 된 지 겨우 6 년만 이었다 . ( 큰 소리 치는 넘이 도망은 왜 가나 ? )   우리의 깡패 황제 주원장은 격노했다 . 게다가 우왕을 옹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이인임 ( 박영규 ?) 도 친원파였다 .   그 와중에 반원파이고 명나라와 수교를 주장하였던 정몽주는 귀향을 가게 된다 . ( 이 귀향에서 돌아오자 마자 규슈로 사신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명과의 관계는 악화 되었고 명은 원나라보다 더 심하게 조공을 요구했고 그것을 그 해 다 내지 못하면 다음 해 조공에 합산했다 . ( 한 명의 욱하는 신하 때문에 진짜 나라 전체가 고생한다 )   우왕 5 년부터 10 년까지 고려는 18 회에 거쳐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입국이 금지된 경우가 여덟 번 입국한 열 번 중 네 번은 사신이 구금되거나 유배되었다 .   그렇다고 약소국 고려가 명나라가 거부한다고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   철마다 사신을 보내야 했고 특히 신년 하례 사절과 황제 축하 사절은 중요한 사행이었다 .   1384 년 명나라로 간 사신들이 중국 땅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이 명나라 사행을 회피하게 되었다 .   명태조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내정되었던 밀직부사 ‘ 진평중 ’ 은 이인임 파였던 ‘ 임견미 ’ 에게 뇌물을 바치고 사신을 사퇴했다 . 그 바람에 명나라로의 출발 시기를 놓쳤다 .   남경까지는 보통 90 일이 걸리는 데 , 이미 명태조의 생일이 50 여 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 . 사신의 지각 도착은 큰 실례로 천하의 명태조 주원장이 이 실수를 그냥 지나갈 리 없었다 . 진평중의 사퇴로 명나라 사신행이 죽음의 사행이 되었다 .   그러자 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임견미가 진평중 대신 정몽주를 천거했다 .   뇌물도 이미 받았고 눈엣가시 같은 정몽주를 제거할 수 있으니 일거 양득이었다 .   우왕도 미안했는 지 정몽주에게 사신행을 강요하지 못했다고 한다 . 그러나 정몽주는 기꺼이 사행을 맡고 , 즉시 출발했다 . 그간의 참전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 지 암튼 정몽주는 대단한 통솔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서 사신단을 독촉하고 최단거리로 일정을 짜고 육지로 상륙해서는 정신없이 말을 달려 아슬아슬하게 남경에 도착하였다 .   남경에 도착한 정몽주는 즉시 명태조를 접견하고 생일 축하 문서를 바쳤다 . 여기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데 중국황제의 생일에 도착하는 나라와 부족은 수십 개가 넘는다 . 이들은 모두 선물과 생일을 축하하는 글을 바친다 . 보통의 황제라면 이런 상투적인 문서는 읽지도 않고 또 주원장은 그 어려운 글을 읽을 실력도 없었다 . 하지만 이 잔혹한 황제는 매사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 냉혹했지만 천부적인 통솔력과 리더십이 분명했던 그는 문서의 내용이 아니라 작성한 날짜를 보았다 . 그리고 그 문서를 작성한 시기가 겨우 50 일 전이며 보통 고려에서 남경까지 오는 시간으로 50 일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밑바닥부터 살아온 그는 세상사에 해박하고 의심이 많은 만큼 음모에 예민했다 . 그는 정몽주의 파견에 고려 조정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대뜸 알아차렸다 .     고려 사람들이 자신의 손에 죽기를 바라는 이 자는 누굴까 ? 그런데 이 자는 그 음모를 멋지게 극복했다 . 가만 이 자는 10 여 년 전 배에서 난파 당했던 그 사람이 아닌가 ? 놀랍게도 주원장은 정몽주를 기억해냈다 . 보통 사람은 바다를 떠다니다가 표류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면 다시 배를 타기는커녕 목욕탕에도 못 들어간다 . 실제 세월호 사건의 학생들이 그렇다고 한다 . 목욕탕에 못 들어간다고 . 정신과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인데 주원장은 21 세기에 만들어진 이 병명은 몰랐지만 과거 양자강을 무대로 활약한 수적 출신인 그는 이를 알아차렸다 .   정몽주의 배포와 능력에 매료된 황제는 정몽주를 후하게 대접하고 이전에 구금되었던 고려 사신들도 석방해서 돌려보냈다 .   1387 년 다시 사신이 된 정몽주는 이 욕심 많고 심술궂은 황제로부터 그 동안 누적된 조공액 탕감은 물론 1 년치 조공액도 감액받는 호의를 얻어내고 귀국했다 . 진짜 대단하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   학자로서 관료로서 정몽주는 탁월한 능력과 도전 정신을 보였다 . 그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보여준 능력과 노력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 하지만 진짜 감동은 지금 부터이다 . ( 놀라지 마시라 ! )   규수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정몽주는 그곳에 잡혀온 많은 고려 양민이 왜구의 노획물이 되어 사는 것을 보았다 . 일부는 데려왔지만 아직 수 많은 동포들이 왜국에 잡혀있었다 . 그는 조정 대신들에게 호소해서 그들을 되찾아오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 이들의 비극은 곧 우리 책임이니 사재를 털어 그들을 구원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이 행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한국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 우리 역사에서 –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 가장 분통터지고 지배층의 행동에 분노가 솟구치는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 우리는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그 때마다 많은 백성이 외국으로 잡혀갔지만 , 지배층은 자신들의 일가친척이 끌려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납치된 백성이나 전쟁포로를 되찾는 데 관심이 없었다 . 납치된 사람들은 으레 돈을 받고 팔리기 때문에 그 들을 찾아오려면 돈이 필요했다 .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의 경우 오히려 조선 정부에서 데려가라고 요구하면서 당시 청나라에 있던 소현세자에게 조선인을 맡긴 것을 보면 실제 요구하는 돈의 액수도 크지 않았을 것 같다 . 그러나 정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쟁 포로가 죽지 않고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라는 구실을 들며 그들을 외면했다 . 심지어 포로가 되었던 병사가 탈출해서 돌아오면 적에게 항복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는 것이 관례였다 .   사실 여자들도 마찬가지여서 화냥년의 어원이 환향녀 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 될 정도다 .   빼앗아간 넘들에게 반항은 고사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이지만 , 그래도 뺏긴 것은 분하니 진정한 피해자인 여인네들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   아무튼 우리나라 지배층은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도망가면서 자기 아랫사람 왕따 시키고 뜯어 먹는 데는 정말 선수다 .   수백 년간 사대부들은 민심이 천심이며 ,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미사여구를 수도 없이 남겼지만 , 정작 정몽주와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정몽주의 행동은 규슈의 지배층에도 깊은 감명을 주어 나중에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들이 더 슬퍼했으며 그들 중 개인적으로 사당을 차리고 승려를 불러 재를 올려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   정몽주의 삶을 보면 그는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관료였다 . 정몽주는 그간의 삶에서 보여준 노력과 헌신 도전정신을 국가의 법과 사회제도 개혁에도 쏟았다 .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포로들의 형편을 보고 포로송환운동을 제기한 것 처럼 그는 어떤 관직에서든지 그 속에서 발견한 낡은 법과 폐단을 개혁하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 그 노력은 만년에 새로운 법전인 < 신정률 > 이라고 하는 법전 하나를 만들었다 . ( 참 부지런도 하시다 . 법전하나를 뚝딱 만드시다니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법전은 전해지지 않는다 )   물론 그는 우왕을 폐할 때는 저항하지 않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며 조선의 영의정 격인 ‘ 수문하시중 ’ 이 되는 등 왕과 권력층이 자행하는 불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순응했다는 후대의 비판을 받았다 .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 완전한 인간이 있을 수 없듯이 완전한 방법도 없고 어떤 정치인이 항상 일관적일 수만은 없다 . 아래 사람이 100 명만 되어도 보스가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 것이다 . 아주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의 기대와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치인이나 보스는 없다 .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개인적 욕심과 대의 명분은 참으로 헷갈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김대중의 예를 들면 그가 대통령 병 환자인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대의 명분과 잘 조화시키고 헌신하여 나름 정치를 잘 하였다 ( 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각자의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이 과거와 자기만족과 자신의 욕심 그리고 야망에 매몰되었는 지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법에서 어느 정도의 헌신과 완성도를 지녔는 지를 함께 물어야 할 것이다 . 그러한 점에서 정몽주의 삶은 인간으로나 관료로나 개혁가로나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감동을 전달해 준다 .   이런 국무총리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