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 몇 년 전에 함께 살던 사람과 크게 다퉜던 날이 생각난다. 책장에는 그간 써왔던 일기가 가득했고 운동화 상자 안에는 전에 사귀던 사람에게 받았던 편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호기심 많고 질투심도 상당한 사람이어서 일기는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질을 주었고 편지상자는 창고에 감춰뒀었다. 나는 일하고 그 사람은 쉬는 날 대청소를 했던 모양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방바닥에는 편지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그 사람은 소파에 앉아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옥신각신. 서로가 언성이 높아졌고 나는 결국 편지상자를 들고나가 불태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불길이 사그라드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휘발유 한 중발을 쏟아 부었다. “편지를 태운다고 내 기억도 태워질까?” 들이부은 휘발유는 한 중발이었는데 타오른 불길은 한 드럼 불량이었다. 그 바람에 세간 살림과 일기장 몇 권이 날아가고 며칠간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편지를 불태우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뚝 떨어져 너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지금의 나는 지난 시간이 만들어낸 결정체인데 지난 시간을 부정하면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너는 누구인가? 영화 <Her>를 보다가 그날의 싸움과 그날의 슬픔이 떠올랐다. 씨어도어와 싸만다의 사랑이 전혀 새로운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랑은 다 그렇게 새롭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오늘의 나를 만든다. OS2는 OS1을 기반으로 새롭게 재탄생 할 것이며, 씨어도어는 싸만다와의 사랑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이란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ㅎㅎㅎ 스파이크 존스의 영화를 무척 좋아했었지만 <Her>앞에서는 머뭇거렸었다. ‘OS와의 사랑? 또 다른 <공기인형>아냐?’ 라는 우려가 앞섰고 디스토피아적인 싸이버사랑은 일본애니메이션에서 <공각기동대>이후 수태 다뤄온, 이제는 낡아빠진 소제인데다 눈요깃거리 가득한 싸이버펑크SF도 아니고 멜로라니, 관람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파이크 존스의 창의성과 재기발랄함을 간과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나서 알 수 있었다. <Her>는 사랑해 보았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헤어져 보았다면 함께 눈물 흘릴 수 있는 이야기다. 또한 사랑이야기 외에도 도시의 삶과 OS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공감하며 고민해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화두를 진지 먹고 던진다.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 이틀간의 단식은 평화로웠다. 지난밤에 보았던 영화를 하루 종일 생각하며 그녀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뒤돌아보는 날이었다. (영화 <Her>를 보면 당신의 ‘그녀’나 당신의 ‘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철물점에 들러 나무를 깎느라 무뎌진 손칼을 갈고 대관령고개로 넘어왔다. 고개를 넘어 횡계리까지 가려다 길옆으로 흐르는 초막곡이 눈에 띄어 차를 세웠다. 이 계곡 바로 위로는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그 뒤로 선자령이 구름에 가려있었다. 원주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전철공사가 한창이어서 땅굴을 파는 인부들만 간간히 눈에 띌 뿐 피서객은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계곡이었다. 구름이 끼고 종종 빗방울이 날렸지만 오랜만에 계곡을 만나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해서 널어 말리고 둥굴레차를 끓여 마셨다.  왜 만날 빤쓰가 하나 뿐이냐고 묻는다면.... 난 빤쓰를 안입고 산다. 빤쓰는 얇은 츄리닝 입을때만....ㅎㅎㅎ 그리곤 꼼짝 않고 길가에 앉아 하루 종일 가면을 깎고 놀았다. 산에 오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공복에 등산하다 산 중턱에서 기운 떨어지면 물팍 꺾인다. 흠흠 ;; 초막곡에서 선자령까지는 왕복 5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등산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등산객에게 들을 수 있었다. 내일 아침에는 도시락을 싸들고 선자령에 오르며 먹을 것을 구하면 오후에는 하산이 가능해 보인다. 산에 소나무가 많고 숲이 깊어 다시 한 번 복령 찾기를 시도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방학을 맞아 떠나온 길일까. 조금 전에 대학생 같아 보이는 두 청년이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고갯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그 활강의 기쁨이 얼마나 꿀맛 같을지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어본 사람만이 알리라. 오늘밤 늦게, 혹은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동해에 다다라 바다를 바라보며 쿵쾅거릴 그들의 심장이 벌써부터 설렌다. 오늘은 꽃 대신에 스파이크 존스가 최근에 만든 단편애니메이션<당신 곁에 잠들고 싶어요>와 2000년도에 만든 Fatboy Slim의 Weapon of Choice 뮤직비디오를 올리겠다.  지 꼴리는 대로 산다는 것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R7YZtUY0Mic <당신 곁에 잠들고 싶어요(2011)> https://www.youtube.com/watch?v=wCDIYvFmgW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