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더회고록]글이 돈이 되는 기적4 2014. 05. 12. 월요일 펜더 지난 기사 글이 돈이 되는 기적 <프롤로그> 글이 돈이 되는 기적 <1> 글이 돈이 되는 기적 <2> 글이 돈이 되는 기적 <3> ‘칼럼’이나 ‘에세이’ 같은 ‘잡문’이 돈이 될까?   2002년 기준으로 원고지 10매의 평균적인 원고료는 1만 원이었다. 신문의 박스기사가 보일 것이다. 그 박스기사 정도의 글이 10만 원이라고 보면 된다. 2014년 현재,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잡지사의 월간 연재물 가격이 A4 1매 당 7만 원으로 책정 됐다. A4 1장이면 원고지 10매 내외가 나온다. 즉, 13년 사이에 물가는 껑충 뛰었는데, 글값은 더 떨어졌다는 것이다. 재미난(?) 사실은 A4 1매당 7만 원이란 원고료가 업계 평균으로 보자면, 결코 낮은 금액이 아니란 사실이다. 딴지와 비교해 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내 기준으로 보자면, a4 1매당 1만 원꼴이다) .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건당 고료’를 내놓기 시작했다. 연재의 경우에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는 경우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연재에 들어간 게 2009년이었다. 그 이후에는 연재를 하더라도 계약서를 쓰는 경우는 없었다. 매체 환경이 극도로 나빠지니 외부필자에게까지 돈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딴지일보를 즐겨 찾을 정도의 성향(?)의 독자라면,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즐겨 볼 것이다. 궁금한데, 한겨레와 경향신문 기자들의 연봉을 아는가? 들으면 깜짝 놀랄 수준이다. 2008년 경향신문이 휘청일 때 경향신문 기자들은 월급의 반을 받고 회사를 다닌 적이 있다. 그때 그 ‘반’뿐인 월급을 보며 허탈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걸로 어떻게 회사를 다니냐?” 88만원 세대보다 못 버는 금액 앞에서 난 연재를 접어야 했다. 기자들에게 제대로 월급을 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기고가에게 기자들보다 많은 돈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1. 선택과 집중 시나리오를 버리고 ‘잡문’으로 먹고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난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교보문고에 출근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딱 4년 만 파면 된다.” 그 생각에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적의, 최단루트를 계산해 봤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었다. 내가 학계에 몸 담고 있는 게 아니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분야도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후광효과 같은 걸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즉,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중’이었다. 내가 가진 리소스로 강연을 한다거나 방송에 나가 한 번에 뒤엎을 수 있을 만한 콘텐츠가 나오기 힘들었고, 설사 나온다 해도 1회용 소모품이 될 것이란 계산이 섰다. 결국 강연이나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 글은 포기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너무도 다행스럽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몇 가지 분야에 관심이 있었고 그에 관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있었다. 바로 ‘역사’와 ‘군사’, ‘섹스’였다. ...천운(天運)이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돈이 되는 분야가 2개나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한 가지씩 설명해 보겠다. ① 군사분야 딴지에서 난 ‘군사분야 전문가’로 알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건 겸사(謙辭)가 아니다. 나는 그저 ‘취미가’ 수준일 뿐이다. 지금도 취미로 즐길 정도이지 이걸 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고, 나에게 ‘마니아’란 칭호를 붙이는 것도 부담스럽다. 말 그대로 순수한 취미이다. 물론, 취미가 과해서 서바이벌용 총을 사 모으고, 만화가들이 총이 필요하면 총을 들고 가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강풀의 <26년>에서 전두환을 저격한 총이 내 총이다) , 어디까지나 ‘취미’다. 톡 까놓고 말해서 군사분야를 가지고 연구를 하고, 전문가로서 책을 내 먹고 사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우선 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 이 업계에서 군사 분야의 최고 한계치를 ‘3만 부’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불멸의 군사잡지’라 불리는 (모형잡지라 보는게 맞겠지만) <취미가>의 부수가 그 정도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모형잡지이고, 상당수의 군사마니아를 끌어 모은 잡지이지만 (이 잡지를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다) , 3만 부 내외 수준이었다 (또, 이때는 우리나라 경제가 유래 없는 ‘호황’이었던 시절이었다) . 게다가 이때는 인터넷도 없었던 시절이다. 시장 자체가 작았다. 이런 데 뛰어들어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 미친 짓이다. 물론, 군사분야로 책을 써서 돈을 버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군사분야가 아니라 ‘경제경영서’ 혹은 ‘자기계발서’의 탈을 뒤집어 써야 한다. '창조란, 무관한 두 개의 분야에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란 말처럼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역사의 명장들과 조직관리, 혹은 자기계발, 경제경영을 붙이는 것이다 (손자병법이나 36계가 직장인 처세술 책으로 팔리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 그리고 이런 책은 너무 많이 나왔다. 이런 좁은 시장에 섣불리 투자할 수는 없었다. ② 섹스 인류의 영원불변한 화두다. 섹스를 빼고 인간을 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여기에는 ‘틈새’가 있다. 바로 <간행물 윤리위원회>가 있었다. 노골적이고 음란한 내용을 신문지면에 올리면, 바로... 그러나 ‘학계’의 연구나 ‘실험’등등의 꼬리표를 달면 무사통과였다. 결국 난 이걸 활용하기로 했다. 국내외의 모든 연구 자료를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입수해서 그걸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걸 사건사고와 연결하고, 연구 자료들끼리 결합시키고, 영화와 문화매체와 상의했다. 단언하건대 ‘섹스’를 주제로 한 글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나올 것이고, 팔릴 것이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난 ‘섹스’에 관한 글을 쓰고 있고,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심지어 비뇨기과 학회지에도 때 되면 한 편씩 글을 쓴다) . ③ 역사 지상학 선생님에게서 글을 배울 때부터 선생님은 내게 ‘사극’을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워낙 역사를 좋아해서 말이다. 그때는 한 귀로 흘려들었는데, 본격적으로 ‘글’로 밥벌이를 하겠다고 마음먹자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섹스와 함께 이 땅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이 돼 주었던 것이 역사다.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콘텐츠가 가지는 파괴력과 흡입력은 시대를 막론하고 절대적이다. 재탕삼탕에 뼈까지 흐물거릴 정도로 우려내도 기본은 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2차 시장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바로 '교육'이다. 정 안된다면, ‘교과서’나 ‘학교’란 타이틀을 찾아다 붙이면 망하진 않을 것이다 (이건 2003년 기준이다. 지금은 또다시 환경이 바뀌었다) . 교보문고를 찾아가 책을 고르는 사람들을 살펴봤다. 아울러 인터넷과 잡지, 신문에 나오는 글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2주 정도 발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덤벼 볼 만하다.” 실제로 덤벼 볼 만 했고, 내 계산은 정확했다. 운도 따랐다. 아니, 운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내가 했던 건 ‘확률’을 높였던 것 뿐이다. 지옥문을 활짝 열었다. 2. 투자 예스 24, 교보문고, 알라딘, 리브로... 한 때 난 인터넷 서점의 최우수 고객이었다. 당시 구매기록을 보면, 1년에 3천 만 원 가까운 책을 샀었다. 헌책방에서도 그 비슷한 수준으로 책을 샀을 것이다 (이건 증명할 수 없지만) . 인천 배다리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차를 몰고가 닥치는대로 책을 사 모았던 기억이 난다. 시바 료타로를 따라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보니 시바 료타로를 따라하게 됐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서재에서 펜 한 자루에 의지하여 소설을 쓰는데, 시바 료타로는 트럭 한 대분의 자료를 들고 와서 소설을 쓴다.' 시바 료타로 <언더위의 구름>을 쓸 당시 러일전쟁을 소재로 쓰려던 작가가 있었는데, 그 전에 시바 료타로가 고서점의 책을 싹 쓸어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전설’은 일본 문학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취재파와 서재파로 나눈다면 난 서재파였다. 어쩔 수 없다. 취재를 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난 책에서 책을 찾아내야 했다. 당시 아내에게 했던 말이 있다. “앞으로 5년은 이걸로 먹고 살 것이다. 투자 금액의 5배는 너끈히 뽑아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이 말은 거짓이었다. 5배? 내가 보기엔 10배는 넘게 뽑아먹은 것 같다. 아울러 5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마르지 않고 파 먹고 있다. 지금 내 방에는 ‘역사’와 ‘군사’, ‘섹스’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석사 논문 급은 나올만한 자료와 책이 있다. 책을 산 다음에는 공부였다. 그리고 틈새를 확인하고, 문체를 가다듬고, 나만의 ‘작업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였다. 당시 일부 선배들은 내가 매문(賣文)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했다. 이제사 고백하는 것이지만, 어린 시절 그 손가락질이 참 뼈아팠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에둘러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결혼을 한 내 실수란 대답과 가족을 핑계로 도망가는 것이란 공허한 메아리였다. 그 뒤로 한 5년이 지났을 때 그 선배들은 하나 둘 이 판을 떠나야 했지만, 어쨌든 난 말석에 이름 한 자 얹어놓고 끝까지 버티고는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난 그때 이 결정이 잘못된 결정이 아닌가를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확신이 흔들리고 있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확신은 없었다. 그저 ‘돈’이었다. 3. 운(運) ‘덕질’의 덕을 보게 됐다. 덕질인생 15년의 결과가 ‘인연’을 만들어줬다. 같이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하고, 토론을 하던 이들. 그들 중 대부분은 오르고 올라가(?) 사회에 나와 보니 ‘멀쩡하게’ 사는 이들이 돼 있었다 (라이프펜도 어찌보면 덕후다. 글에 그리 미치다보니 세상만사 한 발 안 걸친 분야가 없다. 심지어 잠수함관련 글도 쓸 정도로 말이다. 차라리 이 사람을 군사전문가로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 덕질인생 중 알게 된 후배(?!) 겸 동료(!)가 신문사 기자로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내가 만나 희희덕거리던 인물들이 나중에는 문화관련분야 요소요소에 박혀 있었다. 그때 외쳤다. “오시이 마모루 만세!! 가이낙스 만세!! 선라이즈 만세!! 마루이 만세!!” 코 찔찔 흘리며 LD 뜨러 다니다 만난 인연들이 사회에 나와 보니 멀쩡하게 양복입고, 신문사 기자, 출판사 편집자, 문화평론가 등등의 타이틀을 달고 앉아 있었다. (지금의 ‘덕질’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움직이기에 그 ‘인연’의 깊이가 얇다고 본다. 우리 세대의 ‘덕질’은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금전적인 출혈을 수반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지금이야 방안에 앉아 컴퓨터만 부팅하면 수많은 영상물을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발품을 팔아야 했고, 교류해야 했고, 상영회를 해야지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아날로그적 ‘덕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 당시에는 불편하다 생각했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와 보니 이게 다 재산이 됐다. 덕질도 잘만 하면 경쟁력이 된다) (에반게리온과 카우보이 비밥을 비디오로 떠서 본 세대와 P2P로 내려 받아 본 세대. 그 세대의 차이일까? 아니, 지금 P2P로 내려받아 본 세대도 한 10년 지나면 나와 같은 인연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 인연이란 게 묘했다. 작정하고 ‘생존’을 위해 뛰어다닐 때 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펜더님 신문연재 안 해 볼래요?” “펜더야, 나랑 전시회 한 번 안 해볼래?” “펜더야, 알바 한 번 안 해볼래?” 내 소문을 들었던 건지, 아니면 일이 되려고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다. 시장을 조사하고, 문체를 가다듬고, 자료를 모으고, 아이템을 정리하던 그때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정말 인생은 운이었다. 이 연락이 오기 전 이미 한 매체에서 ‘섹스칼럼’을 연재하고 있었고, 그 반응이 괜찮아서 다른 곳에서 입질이 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불에 기름을 부은 거라고 해야 할까? 아니, 네이팜탄에 테르밋을 까 던진 거라고 봐야 하겠다. 신문연재 2개를 돌리기 시작했고, 전시회를 하게 됐고, 사보 알바를 뛰기 시작했다. 4.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예전 상수역 옆의 자투리 벽면에 어떤 미대생(?)이 휘갈긴 그래피티가 있었다.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먹먹했다. 그 벽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많은 응원을 보냈지만, 결국 그 그래피티는 지워졌다. 안타까웠다. 그 그래피티를 한 사람이 그 도전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랬다. ‘잡문’. 선배들이 보기에 매문(賣文)을 해 돈을 벌던 내가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됐다. 내가 글자판기인지, 작가인지 말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전업 작가로 산다는 건 어렵다.” 란 단순한 결론이다. 며칠 전 내 수입 현황을 확인했다. ‘꽤’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일반 샐러리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게 많이 번 건 아니었다. 당시 내 원칙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① 최소한 한 달에 1번 이상 입금이 되도록 한다. ②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돈을 번다. 아마 윤태호 작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4년도인가?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윤태호 작가의 철학을 들으면서 크게 동감했다. 지금은 <이끼>와 <미생>으로 최고의 웹툰 작가 반열에 오른 윤태호 작가였지만, 당시에는 오프라인 매체에서 더 유명한 작가였다. <YAHOO> 를 아는가? 그는 천재이다. 윤태호 작가 “한 달에 얼만큼을 아내에게 주겠다는 건 아내와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야지만, 아내와 내 관계가 유지되고, 우리 가정이 지켜집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다 걸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건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의무입니다.” 당시 윤태호 작가의 작품을 보면, 편차가 너무 컸다. 퀄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다루는 소재와 그림체, 풀어내는 과정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어떨 땐 부조리극을 보는 듯 한 느낌으로, 어떨 땐 정극으로 사회비판을 하는 느낌으로. 어떨 땐 선 몇 개가 슥슥 지나가는 무성의함으로... 인정했었다. “연재해야죠. 가정이 있는데...” 지금도 그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이 새롭다. 가족과 만화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이라는 질문이었는데, “당연히 가족이죠. 그림 따위가 뭐 대수라고. 내 가족이 있고, 그림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진정한 생활인이었고, 최고의 작가였다. 자신의 생활과 작품을 훌륭하게 양립시켰다.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보다 내 가족을 위한 일을 하고, 그 다음 자신의 걸 준비한다는. 나 역시 그랬다. 얼마를 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글로 돈을 번다. 그리고 그걸 다 준다. 그게 내 원칙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었다. ① 글값은 싸다. 때문에 개별단가를 올리지 못하는 한 박리다매 형태로 많은 글을 써야한다. ② 작가도 사람이기에 '휴식'과 '공부'가 필요하다. ③ 대한민국에서 4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내 기준으론(!!)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입금이 되고, 내가 번 대부분의 돈은 생활비로 나갔다는 것이다. 무간지옥의 삶이었다. 한 달에 마감 70개를 돌리던 시절에는 내가 정말 자판기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란 글을 쓰지 않으면 백수처럼 보일까봐 글을 쓰는 존재다.' 란 말이 있다. 중의적인 의미이다. 작가를 밖에서 바라보면, 백수처럼 보이지만 진짜 ‘뭔가’를 하려는 작가들이라면, 그 시간은 오롯이 창작활동이다. 창작은 통찰에서, 통찰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작가들의 통찰과 관찰, 사유의 시간을 밖에서 보면 ‘노는 걸’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인정한다. (여담이지만, 내가 이 직업을 가지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게 내 주변인들이 내게 보여준 반응이었다. 집안행사나 모임, 일 같은 게 있다면 평일 오전, 오후에 직장인을 부르진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연락이 온다) “넌 놀고 있잖아.” 화가 났다. 돈은 남들처럼 버는데, 시간도 내야 한다니. 얼마 전 미술과 설치, 음악을 하는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이 ‘사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이외수를 팔아야지.” “이외수?” “예술하는 이들의 기행(奇行)하면 이외수잖아.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것 때문에 멀쩡한데도 일부러 기행을 하는 작가들도 꽤 돼. 주변에서 못 건들게.” “슬프다. 멀쩡한데, 주변이 귀찮아서 AT필드 치는 거잖아.” “안 그러면 동물원 원숭이가 되는데. 어쩌겠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반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가치는 다르다. 그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와 사회 사이의 골이 깊어져 갔다. 결국 난, 내가 그 골을 메우려 했다. 처절했다. 5. 돈... 그리고 글 신문연재를 하고, 책을 쓰고, 그 책이 터졌다. 강연도 다니게 됐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운’이다. '인간의 노력은 운과 마주칠 ‘확률’을 높여나가는 행위.' 인생이 운이라면, ‘노력’은 그 운의 확률을 높여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에 대한 판단이다. 뒤돌아보면, 난 참 ‘운’이 좋은 놈이었다. 작정하고 돈을 벌기로 결심한 이후 나는 글로 할 수 일들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의외로 그 시장이 넓다는 걸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장에는 작가를 ‘뜯어먹기’ 위해 존재하는 포식자들도 많다는 것도 확인했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자. 사보에 글을 써주는 ‘알바’가 있다.   이 알바는 제대로 자신의 글을 발표한 적도 없고, 자기 이름으로 나간 책 한 권도 없다. 제대로 원고청탁을 받아본 적도, 작가란 ‘타이틀’로 불려본 적도 없다. 다만, 글을 쓰고 싶어하고, 글을 쓰는 재주가 있다. 이 알바는 몇 군데 사이트나 블로그에서 키치한 글을 올려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글로는 생계를 꾸리기 힘들다. 이때 이 사람에게 연락이 온다. 사보(私報) 대행업체 혹은 그 매니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작가와 업체 측을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거간꾼들이다. 10년 전 쯤 당시의 시세로는 원고료의 25%였다(이건 양심적인 수준이고, 30% 혹은 그 이상도 있었다). 거간비로 생각하면 순순히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들은 모델 에이전시의 그것처럼 절대로 작가의 개인 연락처를 업체에 알려주지 않는다. 인정하는 게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  고료의 25%라 해도 워낙 글값이 싸기 때문에 얼마 안된다.  이 사보에이전트의 확장 개념이 출판 에이전트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데, 한때 나도 출판 에이전트를 고용했던 기억이 있다. 이 에이전트와는 다른 일로 틀어졌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기획력도 좋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사석에서 보면 꽤 괜찮은 훈남이다. 게다가 미혼. 쿨럭) , 이 사람의 경우 당시 출판사 수십 군데에 오퍼를 넣어 ‘기획실장’이란 타이틀로 활동했다. 내가 알기론 내 인세에서 매절로 얼마를 받아갔고, 출판사 측에서 또 얼마를 받는 걸로 알고 있다 (이 분과 계약했을 무렵, 내 책 인세는 7%였었다. 평균적인 작가 인세가 10%였는데, 3% 차익이 이 분의 수익인 걸로 추측했다. 책이 터진 경우엔 괜찮지만, 아닌 경우에는 그야말로 ‘용돈벌이’도 안되는 수준이다) . 이 분은 책 뿐만이 아니라 신문연재도 소개해 주곤 했는데, 이 경우에는 일정수준 이상의 사례비를 보내야 했다 (액수가 설정 돼 있었다. 그 연재처의 질은 이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한 번인가 연결 받고는 그 뒤로는 내가 직접 찾아나섰던 기억이 난다) . 아마 이 판의 뒤쪽.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놀랄 것이다.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그 돈을 가지고 프로야구 선수의 FA계약 같은 복마전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아직 ‘낭만’이라는 (혹은 몇 푼 안 되는 돈이기에 무시하는) 이름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엄연히 계약이고, 발주처와 납품처, 선금과 잔금, 마감일자가 박혀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쎈 거부터 가보자. 이 사회에 ‘민폐’를 끼친 글부터 가보자.  다음회에는 내 마음 속 양심의 소리를 꺼내보겠다. 펜더 편집 : 홀짝